모노톤인데 왜 청자 한 방울인가 — 절제와 강조에 대하여
화면을 거의 무채색으로 두고 딱 한 색만 남긴다면, 그 한 색은 언제 나타나야 할까. 절제 속의 강조에 대한, 자개 빛에서 출발한 짧은 미학 에세이.
nacre에는 청자 초록이라는 강조색이 있지만, 이 블로그는 거의 무채색이에요.
먹빛 글자에 한지색 바탕.
청자는 손이 닿을 때만 살짝 올라와요.
”이왕 색이 있는데 왜 안 쓰지?”
싶을 수 있어요.
그 선택에 대한 이야기예요.
퍼블리셔로 일하며 제일 많이 한 말이 있어요.
여기도 강조, 저기도 강조면 강조가 아니에요.
시안에 빨강·파랑·굵게가 다 들어가 있으면 눈은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결국 아무것도 안 봐요.
강조는 희소해야 힘이 생겨요.
화면의 99%가 조용해야 나머지 1%가 말을 하고요.
그래서 색을 아꼈어요.
청자를 곳곳에 뿌리는 대신, 거의 다 무채로 두고 딱 필요한 순간에만 꺼내기로.
그 필요한 순간을 저는 상호작용으로 잡았어요.
그냥 놓여 있을 땐 링크도 버튼도 먹빛으로 가라앉아 있다가, 마우스를 올리거나 포커스가 갈 때에만 청자빛이 속삭이듯 올라와요.
nacre에선 이걸 ink(절제) 모드라고 부르고, 이 블로그가 그 첫 소비자예요.
이유가 있어요.
강조는 지금 당신이 건드리는 것에만 필요하거든요.
읽고 있을 땐 글이 조용해야 하고, 무언가 하려 할 때 그 대상이 응답하면 돼요.
색을 상태에 묶으니 화면이 늘 딱 필요한 만큼만 말해요.
이게 자개와 이어져요.
자개장롱은 평소엔 까만데 빛이 특정 각도로 들 때만 영롱해지잖아요.
늘 반짝이면 그건 자개가 아니라 그냥 번쩍이는 물건이에요.
어둠 속에 있다가 빛 드는 순간에만 살아나는 것 — 그 절제가 자개를 자개답게 만들죠.
화면의 청자 한 방울도 같아요.
늘 떠 있으면 강조가 아니라 소음이 돼요.
가라앉아 있다가 손이 닿을 때만 반짝이니까 그게 강조가 되는 거예요.
오해하기 쉬운데, 덜어내는 건 인색한 게 아니라 집중하는 거예요.
색을 아끼는 이유는 색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아껴야 그 한 색이 제대로 말하기 때문이에요.
여백을 두는 건 채울 게 없어서가 아니라 여백이 있어야 남은 것이 보이기 때문이고요.
수묵화가 검은 먹 하나로 깊이를 내는 것도 그렇죠.
색을 줄여서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하는 것.
한 방울이라서 힘이 있어요.
다 칠했으면 아무 말도 못 했을 그 색이, 아껴뒀기에 손 닿는 순간 반짝여요.
절제는 뺄셈이 아니라 남길 것을 고르는 일이에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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